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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디자이너와 타입 디자이너, 그 사이

학부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고, 이후 ECAL에서 타입 디자인(Type design)을 공부하셨죠. 그런데 스스로를 ‘타입 디자이너’라고 표현하지는 않으시더군요.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매체와 장르로서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는 진희 님께 어떤 의미를 갖나요.

우선, ’글자’ 자체가 시각적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요소이고요. 그것이 모여서 만들어진 책이나, 잘 만들어진 편집 디자인 작업물도 좋아해요. 이런 것들이 제게는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일관되게 가장 중요하고 재밌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글자는 가장 많은 이야기,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매체잖아요. 그것도 큰 매력이고요.

예를 들면, 편집 디자인은 사실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작업이에요. 인쇄물의 내용을 단순한 ‘정보’로서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페이지를 넘기는 과정, 즉 시퀀스(sequence) 자체가 하나의 감상 행위로 느껴지도록 하는 디자이너의 의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에요. 콘텐츠의 전개 방식과 그것을 담아내는 형태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읽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죠. 사진과 텍스트를 한 페이지에 붙여서 함께 보여주느냐, 아니면 펼침면 한쪽에 각각 분리해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같은 내용도 완전히 다르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어요. 

이런 전개 방식을 고민하는 과정이 주는 재미가 참 크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거였어요. 조금 더 제대로 배워서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타입 디자인을 공부하는 데까지 가게 된 거죠.

그런데 저 스스로 ‘타입 디자이너(Type designer)’라고 소개하기는 좀 쑥스러워요. 아직 타입 디자인 분야에 대한 충분한 전문성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저의 주전공인 그래픽 디자인과 비교했을 때도 그렇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 주변에 타입 디자인만 집중해서 진지하게 작업하는 동료나 친구들이 많거든요. 그 친구들이 타입 디자인에 대해 가진 ‘애정’의 크기, 열정이 어떤지 알기 때문에 제가 그들과 같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타입 디자인은 글자 형태가 작은 단위의 포인트만 달라져도 완전히 다른 느낌이 나거든요. 좋은 디자인을 할수록, 이런 디테일에 집요하게 몰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공부하고 연구할 게 정말 많은 분야이고요. 영문 라틴 활자 같은 경우, 완성도 높은 글꼴 하나를 릴리즈하기까지 10년 동안 작업하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에 비하면 제가 타입 디자인을 공부한 2년은 매우 짧은 시간이죠.

그리고 관심사의 측면에서도 ‘타입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다룬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지점들이 있어요. 저는 어쨌거나 그래픽 디자이너로 출발했기 때문에 1유닛(unit)의 활자 세계 안에서만 즐거움을 찾기가 어려울 때가 많아요. 스케일이 큰 비주얼 작업도 다루고, 브랜드 아이덴티티나 아트 디렉션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 컨셉 보드 디자인 작업도 많이 하거든요.

타입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글자의 실용성, 즉 가독성 안에서 최대치의 창조성을 뽑아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조형 원리가 많아요. 글자로서 읽히기 위해 잃지 않아야 하는 ‘규칙’이죠. ‘엑스 하이트(x-height, 글자의 높이)’나 ‘속 공간(counter space, 글자의 안쪽 공간 크기)’처럼 조형적 완결성에 영향을 주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요. 표현하고 싶은 게 있어도 많이 절제하고, 덜어내야 하죠. 그래서 제가 작업할 때, 특히 로고 타입(logo type)이나 타이틀만 정해진 글자 작업을 할 때는 정석적인 타입 디자인보다는 ‘레터링’ 관점에서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반적인 타입 디자이너와 비교했을 때 활자를 다루는 범위와 목적이 다른 거죠. 저한테는 활자 그 자체를 디자인하는 것보다는, 폭 넓은 시각 이미지와 타이포그래피를 함께 다루는 것이 중요해요.

표현적인 측면에서 타입 디자인과 레터링은 무엇이 다른지 궁금하네요.

예를 들어 라틴 타입 디자인은 a부터 z까지 일정한 규칙을 따르는 폰트 패밀리, 글자 세트를 만들어요. 반면, 레터링은 특정한 단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에요. Apple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내가 표현하고 싶은 특정한 사과의 느낌을 이미지적으로 글자에 반영하는 거죠. 접근 방식에 있어서 그래픽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레터링으로 만들어진 글자를 타입화할 때 생기는 어려움도 있어요. 타입 디자인은 글자가 모여서 텍스트로 읽힐 때 고려돼야 하는 규칙들이 있잖아요. 그 규칙에 맞게 수정하다 보면 원래 레터링 상태에서 표현하려 했던 느낌과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는 거죠. 그래픽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봤을 때, 레터링은 똑같이 글자를 다루지만, 그 방식이 드로잉에 가깝기 때문에 접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도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한 디자이너로서 그래픽 이미지를 다룰 때는 기존의 접근 방식과 다른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가령 BI 디자인에서 로고 타입을 만든다고 할 때, 그것의 생김새가 브랜드의 컨셉을 얼마만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지를 우선시하는데요. 전체적인 컨셉과 글자가 가진 ‘인상’이 브랜드의 본질과 조화롭게 어울리는지 확인하는 거죠. 이건 단순히 시각적으로(미감적으로) 예쁘게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요.

로고 디자인할 때 타입 디자인에서 배운 지식을 더 활용해 보기도 합니다. 브랜드 디자인에서는 로고 작업을 할 때 각 요소의 균형 잡힌 배치를 위해 그리드(grid, 가이드 선)를 많이 그리거든요. 대형 브랜드의 매뉴얼 북을 봐도 로고 관련 자료는 항상 그런 설계 도면 같은 그리드 위에 로고들이 배치돼 있고요. 비례적으로 완벽한 조형성을 만들기 위한 장치인데, 수학적으로는 완벽한 대칭이 실제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다소 어색해 보일 때가 있어요. 글자 배치가 잘못된 게 아니라 착시가 생겨서 그렇게 보이는 거거든요. 아주 미세한 차이라서 그리드 레이아웃 안에서만 볼 때는 놓칠 수도 있는 요소에요.

예를 들어 알파벳 소문자 a는 동그라미(o)와 세로획 일자(I)가 합쳐진 형태죠. 그리드의 배치상 동그라미와 세로획의 두께를 완벽한 비례로 맞춰놨는데, 눈으로 보면 글자가 한쪽으로 뭉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동그라미 획과 세로획이 만나는 부분이 두꺼워 보인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이런 식의 회색도(글자를 이루는 흑과 백이 균형을 이룬 정도) 문제가 생기면 그게 어느 지점에서 비롯된건지 알아채고 시각 보정 작업을 해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타입 디자인을 할 줄 알면 그런 ‘눈으로서 보는 균형감’에 대한 감각이 남들보다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아요. 

로고 타입은 보통 4가지나 5가지 알파벳이 모여서 구축되는 형태가 많은데, 사이즈 베리에이션(size variation)을 하다 보면 크기가 커졌다 줄었다하면서 균형감이 깨지기도 하거든요. 그런 경우까지 고려해서 글자들의 합이 어떤 크기로 가져다 놓더라도 동일하게 읽힐 수 있도록 조절하는 노하우가 필요해요. 이럴 때 타입 디자인 공부를 하면서 배운 지식이 작업의 세밀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스위스까지, 다사다난했던 유학시절

유학 시절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학부 졸업 후 곧바로 ECAL이 있는 스위스로 가신 게 아니라, 네덜란드에 먼저 가셨더라고요. 학풍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차이점이 많을 텐데요.

제가 졸업하기 1~2년 전 무렵부터 한국에 ‘더치 디자인(dutch design)’ 붐이 일고 있었거든요. 재밌는 건 더치 디자인이 트렌드가 되기 전, 그러니까 신입생 무렵에 뭣도 모르고 거금 들여서 산 생애 첫 디자인 책이 있는데 그게 더치 디자인에 관한 거였어요. 요즘은 조금 생소한 문화일 텐데, 제가 학교 다닐 땐 캠퍼스에 가끔 전문서를 들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아저씨들이 왔었거든요. 일반 서점에서는 잘 안 파는, 외국에서 들어온 두껍고 어려워 보이는 책들이요. ‘너 이런 거 봐야 된다’ 하면서. 그렇게 붙잡혀서 ‘그냥 구경이나 해볼까’하고 뒤적이다가 되게 마음에 드는 엄청 크고 무거운 책을 하나 본 거예요. 학생 입장에서 꽤 비싼 책이었지만 이상하게 그것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사서 책장에 고이 모셔놨죠.

그러다가 4학년이 끝나갈 즈음에 우연히 꺼내서 들여다봤는데, 알고 보니 그게 더치 디자인 모음집이었던 거예요. 당시만 해도 영어 실력이 별로일 때라서, 안에 내용을 읽어보고 산 건 아니었거든요. ‘더치 디자인이 뭔지 몰랐어도 그때 나는 이게 멋있다고 느꼈나 보다’ 생각했죠. 마침 한국에서도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에 대해 다루는 콘텐츠들이 쏟아질 때였어요. 유명 디자인 잡지에 그 책에 실린 작업들이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WT(Werkplaats Typografie)라고 유명한 네덜란드 디자인 학교가 있는데. 거기서 공부했거나, 직접 더치 디자이너들과 교류하는 한국 디자이너들도 점점 많아졌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르마 붐 (Irma Boom)이나 한스 흐레먼 (Hans Gremmen)이 디자인한 굉장히 실험적인 책들을 찾아보면서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유학을 결심하게 됐어요.

처음엔 석사 과정을 밟을 생각으로 네덜란드에 가셨던 거네요.

네. 사실 ‘디자인 유학’이라고 하면 미국이나 영국에 가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워낙 유명하고 커리큘럼이 뛰어난 학교들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쪽이 딱히 끌리지 않더라고요. 영미권 유학파들은 이미 너무 많기도 하고요. 일종의 반골 기질이 나왔는지, 졸업 후의 진로가 예측 가능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 경로로는 이미 잘하는 사람 많을 텐데 굳이… 내가 한 숟가락 더 보탤 필요가 있을까? 취향적으로도 미국의 대형 에이전시보다는 네덜란드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만든 포스터 한 장이 훨씬 멋지더라고요. 그냥 여기(네덜란드) 너무 멋있다. 내 눈에 멋진 걸 하는 곳에서 배우고 싶다. 그렇게 된 거죠.

그랬는데 왜 곧바로 학교에 들어가지 않으셨어요?

처음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서 건너갔거든요. 그런데 시기가 안 맞았어요. 학교에 입학 원서를 넣으려면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 기다려야 했던 거예요. 너무 막연하니까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친구가 저한테 일단 네덜란드에 있는 스튜디오에 잡 어플라이(job apply)를 먼저 해보라고 권하더라고요. 영어도 유학 준비한다고 한국에서 급하게 1~2년 정도 아이엘츠(IELTS) 공부해서 겨우 커트라인 성적을 맞춘 수준이었고, 솔직히 막상 가고 나니까 자신이 없었어요. ‘이게 되겠어’하는 마음으로 그냥 지원서를 여기저기 넣었죠.

그런데 한 회사에서 인터뷰 보자고 메일이 온 거에요. 암스테르담에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 토닉(Thonik)이었어요.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죠. 온라인으로 1차 면접을 보고, 암스테르담에 가서 대표 디렉터 두 사람(Thomas Widdershoven, Nikki Gonnissen)을 직접 만났어요. 그렇게 인턴십을 시작하게 됐어요. 운이 좋았죠.

단순히 운이라고 보기엔 ‘토닉’은 네덜란드에서 나름 손꼽히는 디자인 스튜디오잖아요. 진희 님을 부른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때 디렉터들이 제 포트폴리오 중에 마음에 들어 한 게 있었는데요. 학부 시절에 친구들하고 같이 소모임처럼 모여서 했던 독립 출판물 작업이었어요. <술래>라고, 한 2년 정도 정기 간행물로 내던 무가지였는데. 주변에 글 쓰는 친구, 사진 공부하는 친구, 일러스트레이션 그리는 친구 등등이 모여서 만든 잡지였죠. 색도 안 쓰고 그냥 흑백으로만 인쇄하는 책자였거든요. 원래 글 잘 쓰는 친구 둘이서만 하다가 영화제에서 저를 알게 되고, ‘우리도 이제 디자인에 힘 좀 줘보자’해서 합류했죠. 근데 저도 그때 막 디자인 공부에 눈뜨던 3~4학년 대학생이라 뭘 그렇게 알았겠어요. 나름 실험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정말 원하는 대로 해보면서 ‘편집 디자인’의 재미에 눈을 뜨게 해준 첫 작업이었는데요. 토닉 디렉터들이 그렇게 뭔가를 주도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제 태도를 좋게 봐준 것 같아요.

그때는 이미 학부 졸업하고 몇 년간 디자이너로 일을 하던 시점이었을 텐데, 학생 시절의 작업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게 재밌네요. 토닉에서의 경험은 어땠나요?

인턴이라고 잡무만 맡는 게 아니라,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그게 제일 좋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10명 남짓 인원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스튜디오여서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셴젠 도시건축 비엔날레(urbanism/architecture bi-city biennale, shenzhen)의 ‘전시 아이덴티티 그래픽’, Power station of art와 Boijmans van Beuningen 박물관, De Apple 아트센터의 ‘포스터 디자인’, 암스테르담 비블리테카 도서관(openbare bibliotheek amsterdam)의 ‘소책자 디자인’ 프로젝트를 함께 했어요. 프로젝트별로 시니어 디자이너와 팀을 이뤄 진행했는데 Power station of art의 전시 포스터는 제가 디자인한 시안이 채택돼서 최종 결과물로 만들어졌죠. 비블리테카는 내부 건물 유리 벽면에 설치되는 그래픽 작업을 통째로 맡아서 진행하기도 했고요.

암스테르담 길거리에 제가 진행한 전시 포스터가 걸린 걸 보니까 진짜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어요. 한국에서 유명한 학교에 다닌 것도 아니었고, 디자이너로서 내가 가진 성향이나 추구하는 방향이 맞는 길인지 불안했거든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감을 많이 얻었던 것 같아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했는데, 되네. 그럼 좀 더 해볼까? 대중에 공개되는 작업을 만들고, 그게 현실에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피드백이 일어나는 이 과정이 너무 즐겁다. 다시 학교를 가는 게 필요할까? 어쩌면 석사가 아니라 일을 더 하는 게 나한테 큰 배움을 주지 않을지 고민하게 됐죠.

비자 관련 문제는 없었나요? 유학생 비자로 간 게 아니어서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쉽지 않더라고요. 근로자 신분으로 비자를 새로 갱신하려면 회사에서 지원해 줘야 하는 것들이 생겨요. 금전적으로나 문서적으로나 증명할 일이 많아지거든요. 그럼 당연히 회사 입장에서 저라는 사람에 대해 따져보게 되죠. 그런 일들을 회사 측에서 감내하면서까지 이 친구를 고용하는 게 맞는 방법인지. 더군다나 정식 주니어 디자이너로 입사하게 되면 인턴으로서 서브 역할을 할 때보다 더 많은 책임이 생기잖아요. 클라이언트들과 커뮤니케이션도 직접 해야 하고요.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영어가 편한 상태가 아니었어요.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지만 전문적으로 피드백을 받고 의사결정 과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죠. 객관적으로 저 자신에 대해서 돌아봐도 정규직 전환에 호의적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6개월간 같이 일해보면서 확인한 것들이 있다 보니까, 인턴십 기간 종료 뒤에도 프리랜서 형태로 토닉과 몇 개의 작업을 더 이어서 했어요. 현대 시티 아울렛 아이덴티티 리뉴얼 프로젝트가 들어왔는데, 한국어를 모르는 유럽인이 한글 다루기가 어렵잖아요. 조형적으로 어색해지니까요. 그런데 마침 현지인이 회사에 있었던 거죠(웃음). 현/대/시/티/아/울/렛 일곱 글자를 타이포그래피로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인인 네가 한 번 영문하고도 연결성 있게 만들어줘라. 그래서 맡아서 진행했죠. 그래픽 작업도 보조하고요.

동료로는 괜찮지만, 식구로 받아줄 정도는 아니었군요. 토닉에서 나온 뒤에 에이전시에서도 일하지 않으셨나요?

네, 파브리크(Fabrique)라는 디지털 디자인 에이전시에 단기간 채용 디자이너로 들어가서 잠깐 일했죠. 거기서 일하면서 스스로 받아들였어요. ‘아, 공부를 더 해야겠구나.’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끼셨어요?

당시에 객관적으로 저를 본다면, 한국에서 이제 갓 디자인 학부를 졸업한, 그냥 디자인 전공생이었어요. 조건만 놓고 보면 그랬죠. 디자이너로서 가진 잠재력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일종의 ‘라이선스’ 같은 게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됐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 스스로도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 공부가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강해졌고요. 

파브리크에서 만난 디렉터가 해준 말이 있어요. 디자인을 대하는 너의 접근 방식이나 그걸 구현하는 과정을 보면 네가 잘한다는 걸 알겠는데, 그게 좀 더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통해서 다듬어지면 좋겠다고요. 제 작업 성향이 에이전시 보다는 크리에이티브 씬이 더 맞을 것 같다고도 얘기해줬죠.

‘너는 지금 여기 있을 게 아니라 더 배워야 한다’는 얘기를 무척 젠틀하게 해준 셈이네요.

적응을 잘 못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제가 디자이너로서 추구하는 방향을 이 회사에서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을 듯하니,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더 맞는 쪽으로 다듬을 수 있는 학교에 가라고 권유해준 거죠. 납득이 됐어요. 현실적으로 따져봐도, 학위를 가지고 있어서 손해볼 건 없겠다 싶었죠. 가령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요.

한국으로 치면 ‘제일기획’ 같은 대형 에이전시에서 만난 상사가 건넨 조언이라 더 그랬을 것 같아요.

작은 곳에 있다가 큰 곳에 가보니까 ‘나는 에이전시보다는 디자인 스튜디오가 더 맞는 타입이구나’하는 것도 알게 됐어요. 파브리크 같은 대형 에이전시는 인하우스 디자이너도 매우 많고, 수주하는 프로젝트도 웹 기반의 디자인 시스템을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가 대부분이었어요. 대기업이나 유명 브랜드, 금융기관이 주 고객이라 굉장히 분업화한 작업 프로세스를 따라 움직이고, 작업물의 성격도 상업적이고 규격화된 것들이 많죠. 

그런 특성 덕분에 새롭게 배운 점도 많았어요. 사용자 입장의 UI나 서비스 디자인 과정을 보고 브랜드 디자인 전략을 세우는 방법론이나, 브랜드 매뉴얼 북을 구성하는 양식 같은 것들요. 대신 아무래도 구성원의 자율성은 떨어지죠.

반면에 토닉 같은 디자인 스튜디오는 상주 인원도 적고, 조직이 작으니까 그때그때 필요한 외주 인력과 협업하면서 긴밀하게 움직이는 게 가능해요. 포트폴리오도 대부분 미술관이나 공공기관 같은 예술, 문화 관련 작업이 많아요. 저는 후자처럼 디자이너 개인의 자율성과 역량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환경에서 만족감이 훨씬 크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학교를 더 찾아봤죠.

ECAL에서 배운 것들

ECAL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3년 동안 현지에 있는 미술학교들을 대부분 찾아가 봤지만, 제가 정말 원하는 곳을 찾기 어려웠어요. 타이포그래피 중심의 석사 과정을 다루는 곳이 없었죠. 비용도 만만치 않았어요. 그러다가 암스테르담에서 신진 사진작가를 소개하는 언신 포토페어(unseen photo fair)를 갔다가 처음 알게 된 거예요. ECAL에서 사진 전공하는 학생들이 만든 전시 부스가 있었거든요. 작품들 자체만 놓고 보면 제 취향은 아니었지만, 공통으로 느껴지는 어떤 ‘느낌’이 있었어요. 그들만의 분위기라고 할까요. 각자가 지향하는 방향성이 명확히 보이고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무척 명료했죠. 그게 참 마음에 들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는 어떤 곳인가 싶어서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는데 타입 디자인 석사(Master Type Design) 과정이 있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해가 해당 학과가 생긴 지 두 번째 해더라고요. 원래 ‘아트 디렉션(Art direction)’이라는 전공으로 커리큘럼이 짜여 있었는데, 사진(Master photography)과 타입 디자인으로 나뉘면서 각 전공의 성격을 확실하게 살렸더라고요. 학비도 부담이 훨씬 적었고요. 그러다가 앞서 공부하신 한국인 졸업생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연락처를 찾아 메일을 보내봤어요. 타입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양희재 님이었죠. 감사하게도 답변을 주셨고 그걸 참고삼아 준비해서 ECAL 딱 한 곳만 원서를 넣었죠.

배수의 진을 치셨군요.

맞아요. 마지막 옵션이었어요. 비자 연장 기간도 다 끝나서 유학생 비자가 아니면 한국에 돌아가야 했거든요. ‘혹시 합격 할지도 모르니까 생활비를 미리 벌어두자’ 싶어서 몇 개월간 다른 직종으로도 바짝 일했죠. 국내 대기업 무역회사의 네덜란드 지사였는데, 디자인하고 무관한 사무직 업무였어요. 덕분에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감각도 익힐 수 있었죠. 네덜란드에서 각자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한국분들도 많이 만났고요. 그러는 와중에 기적적으로 입학처에서 인터뷰 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도 참 열정이 넘쳤던 것 같네요.

최종 합격 통보까지 얼마나 기다리신 거예요?

12월에 원서를 내서 5월에 면접을 봤고 그해 여름에 합격 통보를 받았으니 6개월 정도가 걸린 거죠. 사실은 안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유학원의 도움을 체계적으로 받아서 학교가 원하는 수준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가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거든요. 저는 현실적으로 그런 도움을 받을 여건도 안 됐죠. 혼자 준비하다 보니 불안했지만, 다행히 학교에서는 제가 여러 회사와 인턴이나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쌓은 작업물을 좋게 봐주셨어요. 타입 디자인에 대한 전문적인 배경지식은 없지만, 해온 작업에서 가능성이 보인다고 판단했던 게 아닐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만약 그때와 동일한 조건으로 지금 다시 지원한다면 합격 못할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은 ECAL의 타입 디자인 과정 자체도 엄청나게 유명해졌고, 그때 당시의 저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이미 갖춘 분들이 많이 가시거든요. 현지에서 타입 디자이너로 일하던 사람들이 가서 공부하는 경우도 많고요. 제가 입학할 땐 아직 신생 학과였기 때문에 분명 그 덕도 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CAL의 교육과정은 어땠나요?

에칼은 학교 자체가 단순히 아티스틱한 요소보다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실력을 만드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커리큘럼 수준이 높고요. 각자의 개성이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도 좋지만, 완성도 있는 작업물을 만들 줄 아는 능력이 더 우선시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유럽의 예술 학교’하면 상상되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와는 좀 다르군요.

석사 과정이지만 전반적으로 좀 타이트해요. 학기마다 워크숍이 있고, 매년 각자 완성해야 하는 개인 프로젝트가 4개씩 있어요. 학년말 평가(evaluation)가 있는데, 결과물이 학과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이 들면 다음 학년으로 못 올라가요. 알게 모르게 친구들끼리도 경쟁 구조가 생기죠. 이미 잘하는 애들끼리 모인 환경에서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다들 욕심도 많고요. ‘쟤는 저 정도 하는데,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할까?’ 하는 자기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도 약간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같아요. 잘 만들어진 작업은 학교 공식 인스타 계정에 올라가거나, 외부로 노출 시키려고 하거든요. ECAL도 결국 인력 배출을 통해서 비즈니스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 학생들이 이렇게 잘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해요.

석사 심화 과정으로 운영하는 ‘디자인 포 럭셔리 앤드 크래프트맨십(Design for Luxury & Craftmanship)’ 코스가 그런 ECAL 고유의 깐깐한 색깔을 잘 보여주는 듯해요.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품 하우스들과 실무 협약을 맺고 진행되죠. 타협이 불가능한 퀄리티, 그리고 그 안에서의 독보적인 예술성. 럭셔리 디자인이야말로 극강의 상업성과 창조성이라는 양극단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 구현할 수 있는 분야잖아요.

맞아요. 그리고 ECAL만 그런 게 아니라 로잔에 있는 학교들이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는 듯 해요. 호텔리어를 육성하는 학교가 있는데, 거기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들었어요. 호텔 산업 업계의 탑 레벨 인력을 만들어내는 교육기관인 거죠. 아무래도 스위스라는 나라 자체가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하잖아요. ‘멋져야지. 그런데 일단 퀄리티가 좋아야 해’ 약간 이런 거. 무조건 일단 퀄리티가 최고여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예술을 가르치는 학교여도 학생 개개인의 자율성보다는 어떻게든 최고 수준으로 능력치를 끌어올리게 만드는 규율, 규범 같은 게 중요시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그래서 다니던 당시에는 저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이 정도의 수준만큼 못해내면 안 되겠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니까. 그래서 힘들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때 그런 과정을 겪을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스스로를 밀어붙여야 했던 과정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디자인의 방향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유럽 외노자, 한국인 유학생, 디자이너 : 김진희의 정체성

외국인 근로자로서 네덜란드에서 보낸 3년, 유학생으로 스위스에서 보낸 2년.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며 버틴 5년의 시간이 지금의 ‘디자이너 김진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내 생각이나 방식에 대한 확신을 갖는 거에 증거가 생긴 것 같아요. 거기서 제가 직접 인정받은 것들을 토대로요. ECAL에 있을 때, 제가 평소에 좋은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거나, 그래픽 디자인 필드에서 인정받는 디자이너들에게 개인 프로젝트 피드백을 받을 기회가 종종 있었어요. ‘와, 이 사람이 내 작업을 봐준다고?’ 싶은 사람들이요. 그중에는 유명세 때문에 저 나름의 판타지를 갖고 있던 분도 있었죠. 그런데 막상 강의실에서 만나보니까 저랑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인 거예요. 대외적으로는 무척 좋게 보였는데 실제로는 인간적으로 실망스러운 사람도 있었고요. 아, 다 똑같구나. 어떤 틀이 깨지는 느낌이었어요.

특히 인상적인 건 그분들의 공통된 태도였는데요. 아무리 유명하고 좋은 작업을 한 스타 디자이너라도 그걸 으스대거나 과시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거예요. 경험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저보다 훨씬 성숙하고 더 많은 걸 알고 있는데도 그걸 학생들한테 알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오히려 겸손하죠. 실력 차이나 유명세 차이와 상관없이 서로에 대해서 존중하는 태도가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너는 그런 작업하는구나, 멋지네. 난 이런 거 해.’ 이런 쿨한 태도가 작업자로서 자존감을 키우는 데 도움을 많이 준 것 같아요.

실력자의 겸손이라. 그거참 귀하죠. 한국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장면인 것 같아요. 업계를 불문하고 직책이나 연차, 나이 기준으로 줄 세우는 게 자연스러운 문화니까요. 그 위계질서 때문에 암묵적으로 ‘질문할 수 없는 것들’이 생기는 경우도 많고요. 서로가 서로한테 ‘급’을 매기는 게 익숙하다고 할까요.

맞아요. 저도 어쨌든 학부생까지 한국에서 교육받았으니까 ‘가르치는 사람’은 그 자체로 나보다 높은 사람이고, 그 지위에서 느껴지는 어려움이 있었거든요. 괜한 주눅이 들 때도 있었고요. 한국 사회는 트렌드에 굉장히 민감하고, 문화적으로도 다양성보다 대중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크잖아요. 그게 ‘안전하다’고 느껴지니까요. 가성비를 중요시하는 것도 그런 분위기에 한몫하는 것 같아요. 대상이 무엇이든 내가 지불한 만큼의 등가 가치를 돌려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거요.

가성비! 한국의 인력 시장만큼 가성비에 좌우되는 영역이 있을까 싶네요. 저만해도 그래요. ’나 지금 돈값 하고 있나?’ 끝없이 스스로한테 되묻게 되는 거요. 특히 프리랜서로 일할 땐 더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기 쉬운 것 같아요.

사실 저도 뭐 물건 살 때 ‘내가 이만큼 지불했을 때 그만큼 받을 수 있나?’ 이런 거 많이 따지거든요. 합리적인 소비가 좋은 건 당연히 맞는데, 문제는 디자인이나 문화 산업 분야에도 가성비를 너무 따진다는 거죠. 준 돈만큼 확실하게 퀄리티가 보장되는, 검증된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규모가 큰 에이전시로 일이 몰리잖아요. 반면에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나 신진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많지 않죠.

제가 본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그래도 젊은 디자이너들한테 최대한 많은 기회를 주려고 노력한다는 거예요. 업계가 계속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고 키워줘야 한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문화, 예술 분야를 대하는 사회 전반의 태도도 그렇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한국에서도 어떤 레거시를 무작정 따르기 보다는 자기만의 판을 새롭게 만드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사례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꼭 ‘유명한 대형 에이전시 출신 누구’라는 타이틀을 수식으로 걸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걸 꾸준히 시도하고, 사회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발굴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는.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적어도 저는 유럽 디자이너들의 그런 태도나 경향성을 보면서 제 작업에 대한 자기 확신을 갖게 된 것 같아요. 

2020년 즈음 ECAL에서 석사 학위를 따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오셨죠. 팬데믹 때문이었나요?

네, 2020년 겨울이었는데, 졸업 전시할 무렵에 코로나가 터지고 도시가 록다운(Lock down) 됐어요. 원래 현지에서 다시 취업할 계획이었는데 구직 활동은커녕 외출 자체가 불가능했죠. 우선 한국에 가서 가능한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생각하고 돌아왔어요. 시기적으로 뭔가를 할 수 없었기에 실망스러웠죠.

그때 유럽 상황에 비하면 한국의 거리두기 제재는 훨씬 관대한 편이었죠. 이탈리아 현지 상황을 다룬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도심에서 죽은 사람들이 들것으로 실려 나가는 걸 보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나요.

맞아요. 지역간 경계선을 넘어설 수가 없었어요. 그냥 집 안에만 있어야 되고 심지어 어떤 곳은 경찰들이 항상 서 있어서 표를 보여줘야 했어요. 지금 마트 가는 중이다, 다시 마트에서 돌아왔다. 이런 거. 꽤 심각했어요. 학교에서도 다들 졸업 작품을 준비는 하지만 사기가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죠. ‘이렇게 해서 무슨 의미가 있나,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이 다 죽어 나가는데.’ 심지어 졸업을 안 하고 나간 애들도 있었어요.

정말 암울했네요.

제 졸업 작품도 애초 기획했던 내용의 50%밖에 진행하지 못했어요. 'La Maison Unal' 이라는 프로젝트 인데. 조각가 조엘 우날 (Joel Unal)의 집이 가진 독특한 거품 형태의 구조와 공간에서 전달되는 요소를 이해하고, 저의 해석대로 풀어내고자 했던 프로젝트예요. 여러 개의 돔 형태의 건물이 모여서 집 전체를 이루는 구조인데, 직선이 하나도 없고 곡선으로만 이뤄져 있어요. 되게 독특하죠. 우날은 30년간 그곳에 살면서 집을 직접 지었는데요. 기존의 건축 방식을 따라 하는 대신, 조각가로서 자신의 관점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 자세를 반영하려고 노력했죠.

거기서 영감을 받아서, 당시 제가 머물던 작은 방의 주변 배경과 거기서 흡수한 내용들에 대한 해석을 글자 형태에 담고 싶었어요. 비주얼 언어 수단으로 그린 글자 모양의 펜 드로잉과 함께, Unal Serif, Italic, Sans 활자를 만들어 텍스트를 쓰고 책을 디자인 했죠. 

디자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 집을 실제로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있는 곳은 스위스였고, 우날의 집은 프랑스에 있거든요. 기차 타고 2~3시간 거리인데 국경이 다르니까 아예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조건적으로 제한이 너무 많으니까 의도한 바의 절반 밖에 보여주지 못했죠. 지금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 많아요.

그래도 무사히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왔으니 다행인걸요. 귀국 직후 상황은 어땠나요? 바로 사업자를 내진 않으셨잖아요.

원래는 졸업하고 해외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한국에 와서 상황을 보면서 프리랜서로 일했어요. 졸업 이전부터 5~7년 정도 프리랜서로 활동했고, 성수동에 있는 카페 브랜드 '타임 애프터 타임'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맡기도 했죠.

초반에는 제가 먼저 연락해서 일을 진행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브랜드 회사에 잠깐 있다가 제가 생각했던 방향과 달라서 나왔고, 이후로는 프리랜서로 지냈죠. 2022년에 ‘파사쥬’라는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했어요. 그해 11월 마곡에 스튜디오 사무실도 얻었죠. 작년에는 언리미티드 에디션에도 ‘파사쥬’ 이름으로 참가하고, 대외 활동도 많이 했어요.

한국에 돌아오고 3년 동안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미미했던 네트워크가 많이 넓어졌어요. 해외에 나가도 작업을 유지할 수 있는 여건들을 어느 정도 구축해 놓은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밀도 높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핫 라인’을 만드셨군요.

네. 서로 일하는 방식이나 태도가 맞아야 이후에도 계속 같이할 수 있잖아요. 성향이 맞을 것 같은 사람과 직접 부딪혀보면서 일을 해봐야 그걸 알 수 있더라고요. 아무리 유명한 제작 업체라도 나랑 안 맞을 수 있거든요. 경험은 길진 않아도 나름 맞는 인프라가 생긴 점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올해 다시 해외로 나갈 예정이거든요. 이제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것 같아서 안심하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파사쥬(Passage)라고 하는 이름은 사전적 의미는 ‘통로’, ‘아케이드(Arcade)’를 의미하잖아요. 어떤 의미예요? 운영하시는 디자인 오피스 이름을 ‘파사쥬’로 지은 건.

패시지(passage), 그러니까 '단락'이라는 의미도 있어요. 저는 텍스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 의미를 담는 것도 좋았죠. 영어로 읽으면 '패시지'지만, 저는 일부러 “파사‘쥬'”라고 표기해요. 유럽의 쇼핑몰에 있는 실내 통로, 양쪽으로 상점들이 늘어선 아케이드를 보면 그 공간감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좋았거든요. 야외에서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새로운 공간에 온 느낌이 들었어요. 개인이 하는 작은 상점들이 늘어선 게 매력적이었죠.

사실 거창한 걸 좋아하지 않아서, 이름 자체가 주는 힘이 크지 않았으면 했어요. 파사쥬는 흔한 이름이에요. 프랑스에선 특히 흔하죠. 누구나 알 법한, 평범한 느낌이에요. 일종의 ‘아지트’ 같은 거요. 제가 좋아하는 스위스의 스튜디오는 이름이 '놈(Norm)'이에요. 자기들이 뭐로 불리는지는 중요치 않아 보이죠. 대신 자기가 한 작업을 잘 만들고 싶어 해요. 이름보단 작업으로 기억되는 게 중요해 보였어요. 파사쥬도 그런 의미예요. 걷다 보면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는 공간이자 통로 같은 거죠. 딱히 대단한 의미는 없어요.

〈얼굴없는 작업자들〉

언제부턴가 '퍼스널 브랜딩'은 창작 노동을 하는 모든 이에게 필수 교양 영역이 됐다. 작업자로서 선택받고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적정 수준의 유명세란 과연 무엇일까. 또,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 걸까. 업계 사람이 아닌 친구도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는 동료의 인스타 계정을 볼 때면 복잡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하지만 '제작 공수'에 값을 매겨 먹고 사는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일을 제대로 하는 것 만큼이나, 일한 나를 전시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제작 공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하는데 불필요한 꾸밈노동과 체면치레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좋은 작업자는 오직 작업으로 자신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할까? 프로젝트룸과 얼굴 없는 작업자들의 허심탄회한 일 이야기.

April 16. 2024

인터뷰이: 김진희

에디터: 문희경

Passage(파사쥬) 1부

얼굴없는 작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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