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작업자들 4편: 우용
에디터 문희경

Editor’s Note.

‘감독님'이라고 하면 어쩐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엄격하고, 쉽게 타협하지 않으며 끝까지 만족하지 않는, 조금은 뻣뻣한 예술가의 상 말이죠. 하지만 인터뷰이로 만난 우용 감독은 조금 달랐습니다. 앞서 언급한 면모 또한 가지고 있었지만, 웃음이 많고 스스로를 '가성비 좋은 감독'이라 말할 정도로 허세 없는 사람이었죠. 작업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타인'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꺼냈습니다. 정체성은 혼자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유연하게 변화하는 '태도'라고요. 그의 말을 들으며, 표현이라는 행위 자체가 결국 타인을 전제한다는 사카모토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표현이란 결국 타자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추상화랄까, 공동화라고 할까,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면 개인적인 체험이나 아픔, 기쁨은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어떤 절대적인 한계가 있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결손감이 있다. 하지만 그런 한계와 맞바꾸어 전혀 다른 나라,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모종의 통로가 생긴다. 언어도 음악도 문화도 그런 것이 아닐까." - 사카모토 류이치,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고유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체 없는 '나다움'에 집착하는 대신,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바로 그 유연함이야말로 쉽게 꺾을 수 없는 단단함이라고 말이죠. 진지하지만 웃긴 사람, 자기 기준을 갖되 그 안에 갇히지 않는 사람, 자기 색을 고집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자기 색이 보이는 사람. 그런 동료를 만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우용’이라는 색깔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일하시기 전엔 ‘온스테이지’에서 촬영 감독으로 계셨죠?

네, 이제 독립한지 1년 됐네요. 뮤비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퇴사하고서가 맞긴 한데, 회사를 다니면서도 작업은 꾸준히 했어요. 첫 작업인 ‘감정둔마(2021)’도 온스테이지 있을 때 한 거고요. 여러 가지로 회사에서 배려를 많이 받아서 가능한 일이었죠.


사실 온스테이지 출신이라는 건 꽤나 좋은 타이틀이잖아요. 인디 아티스트들한테는 꿈의 무대이기도 하고요. 아티스트분들하고 작업할 때 그 자체로 주는 이점이 있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아무래도 익숙한 플랫폼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믿음이 있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일할 때 도움이 되게 많이 됐죠. 그래도 종종 타이틀이 저 자신보다 크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제가 했던 일들보다 그 이름값이 더 커서 민망한 느낌 있잖아요. 그래서 누가 ‘와 온스테이지 출신이네?’ 그러면 손사래 치고 그래요. 그냥 뭐 촬영하는 일 한 건데 그렇게까지 띄워주시면 약간 민망하더라고요.


원래 학교에서 영화 음향을 공부하셨다고 들었어요. 영화가 아닌 뮤직비디오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걸 제일 빠르게 할 수 있는 방향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찾은 게 뮤직비디오였죠.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더 재밌고 저한테 잘 맞더라고요. 성격상 많은 사람과 동시에 협업하는 걸 어려워하는데, 뮤직비디오는 혼자서 하거나, 소규모 협업이 가능하다는 점도 매력적이었고요.


감독님 작업들 보면 색감이 참 화려하고 다양해요. 특히 일본적인 정서가 많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작업하셨던 뮤지션 정민혁 님의 <도서대여점> 뮤비나, 신해경 님의 <종이꽃 정원>도 그렇고요. 마이너하게 갈 거냐, 커머셜하게 갈 거냐 하는 방향적인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작업이든 감독님 특유의 색채가 깔려 있죠.
아무래도 일본 영화들을 즐겨 보고 좋아하는 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영화과 다닐 때 얘긴데, 왠지 영화과 재학생이라면 좋아하는 영화 감독 한 명쯤은 있어야 할 것 같은 거에요. 실은 박찬욱 감독을 정말 좋아했는데, ‘나 박찬욱 감독 좋아해’라고 말하자니 너무 클리셰같이 느껴지는 거죠(웃음). 그래서 찾아봤어요. 내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더라. 왓챠 같은 데 보면 제가 봤던 영화들을 분석해주잖아요. 제가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를 정말 많이 봤더라고요. 절대 골라서 본 게 아니었는데, 모아놓고 보니 그랬어요. 그 때 알았죠. 내가 이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그때부터 조금 더 많이 보고 이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와이 슌지 감독도 사실 엄청 유명한 감독이라서… 결론적으로는 이러나 저러나 클리셰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됐다는 슬픈 사연이(웃음).


감독님 필모 중에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것들 보면 공통적으로 ‘꿈’이라는 테마가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해요. <아스피린 오버도즈>도 그렇고, <랑데부>도 그렇죠. 이어질듯 어긋나는 꿈 속 이야기라는 설정이 음악의 감정 전달이나 가사 해석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듯 한데요. 이런 테마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유가 있나요?
꿈이라는 무의식의 공간이 그 안에서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잖아요. 특히 현실엔 없는 것들을 마치 진짜 있는 것처럼 보여줄 수 있죠. 그게 제가 추구하는 영상 미학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영상이든, 사진이든 이미지를 만들 때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캡처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을 보여주자는 거에요. 색 보정 용어 중에 ‘화이트 밸런스’라는 게 있어요. 하얀색을 진짜 하얗게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런데 저는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여기에 없는 것들―쉽게 말하자면 영상의 세계 안에서만 구현 가능한 ‘환상’을 최대한 보여주고 싶죠. 특히 슬픔이라는 감정을 전달할 때 이 환상이라는 장치가 유용하게 쓰이는 것 같아요. 말씀주신 것처럼 그 닿을 수 없음에서 오는 먹먹함, 아련한 정서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더 극대화해주니까요.





최근에는 무척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하고 계시죠. 그래도 감독님의 주축이라고 하면 신해경님이랑 지소쿠리 클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팀의 색깔이 완전 다르잖아요. 뮤비 작업하실 때 각각 어떻게 접근하는 편이세요?
이 작업을 누가 보는지에 대한 생각을 제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가령 ‘이상한 경치’를 예로 들자면, 템포가 엄청 느려요. 신해경을 모르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기 힘들다 싶을 정도거든요. 그런데 그건 다 이유가 있어요. 그만큼 곱씹어서 듣고, 봐야하는 작업이기 때문이에요. 신해경의 음악은 감정의 표현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이런 기준들이 전반적인 연출에도 영향을 미치죠. 색깔 조명도 더 많이, 더 다양하게 쓰고 하는 식으로요.

반면에 지소쿠리 클럽은 지루하지 않게, 더 템포감이 느껴지게 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써요. 작업 과정에서도 아이디어를 내거나 하는 게 더 열려있고,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찍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밖에 새로운 아티스트와 뮤비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건 아티스트가 어떤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보여지고 싶은지인 것 같아요. 예쁘게 보이고 싶을 수도 있고, 친근하게 보이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술가처럼 보이고 싶을 수도있는 것처럼. 저는 큰 틀에서 봤을때 아티스트에 대해서, 곡에 대해서 광고를 한다고 생각하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작업자로서의 고유함에 대하여



대화하면서 느끼는 건데, 감독님은 성격 자체가 단순하고 조급함이 없으신 편인 것 같아요. 뭔가 여유가 느껴진달까요.
아녜요, 저 엄청 조급한 편이에요.


정말요?(웃음) 어떤 면에서 그래요? 타인의 인정? 아니면, 금전적인 부분?

저만의 고유함에 대한 조급함이 있는 것 같아요. 진짜 부끄러운 얘기지만,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저는 제 뮤직비디오가 나오면 세상이 발칵 뒤집힐 줄 알았어요. 제 작업들은 다 크레딧이 짧거든요. 보통 그 정도의 퀄리티를 내려면 크레딧이 굉장히 길어야 하는데 저는 길어야 다섯 줄이예요. 제가 거의 다 하거든요. 그게 저만의 어떤 자부심이었죠. 가성비가 좋은 감독(웃음).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걸 신경 안쓰더라고요. 오로지 작품이 좋은가, 아닌가. 이 기준으로 봐주시는 거에요.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생각했어요. 이게 나의 독보적인 강점이 될 수 없다면 나만의 고유함을 위한 넥스트 스텝은 뭐가 돼야 할까. 그걸 어디서 찾아야 할까. 거기서 오는 어떤 갈증같은 조급함이 있어요. 어떤 작업을 하든 그게 항상 밑에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진짜 그렇네요. 감독님 작품은 다 크레딧이 짧아요. 뮤비 타이포 작업도 다 직접 하시는 거죠?
네, 민망하지만 그렇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크레딧 한 줄 한 줄이 다 돈이기 때문에(웃음). 보통은 예산이 한정적인 경우가 많아서 왠만한 것들은 직접 제가 다 하고 있어요. 물론 매번 모든 걸 다 혼자하진 않고요. 작업에 욕심내다보면 남는 게 없을 때도 많죠.


그럼 짖궃은 질문 한 번 해볼게요. 예산이 없다시피 했는데 결과물이 좋았던 작업도 있나요? 
지소쿠리 클럽의 ‘work shit sleep’이랑 ‘get my money back’이 그랬는데요. 제작비가 거의 안들었는데 결과물이 꽤 좋았죠. 특히 ‘work shit sleep’ 같은 경우는 원래 촬영 예정도 없었다가 갑자기 찍은 거거든요. 발매가 일요일인가 그랬는데. 목요일에 지소쿠리 클럽 친구들 만나서 노래를 처음 들었어요. 그런데 너무 좋은 거에요. “아 이거 뮤직비디오 찍으면 좋겠는데?” 제안했죠, 진짜 즉흥적으로(웃음). 그래서 다음 날 모여서 빠르게 찍고, 토요일날 편집하고 일요일날 릴리즈 했어요. 다행히 다들 좋아해주시더라고요(웃음).







아니 세상에. 그 뮤비가 그렇게 급조됐을 줄 몰랐어요.
특별히 지소쿠리 클럽 친구들이랑 작업할 때 그런 케이스가 많은 것 같아요. 작업할 때마다 저한테 물어봐요. “야 진짜 끝난 거 맞아? 뮤직비디오가 된다고 이게?”(웃음).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이유는 지소쿠리 클럽 제 6의 멤버로 불리는 매니저 하진이라는 친구 덕분이에요. 아시다시피 저는 클라이언트한테 맞춰주는 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피드백을 따라가다보면 작업이 전반적으로 노멀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하진이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게 해줘요. 저한테 좀 더 가도 된다고, 제 방식대로 해도 된다고 밀어주고 아이디어도 열심히 내주고요.

‘get my money back’도 그런 경우였어요. 처음에 색 보정을 그냥 제 식대로 임의로 해서 주고 “나중에 맞춰줄테니까 색감은 신경쓰지 말고 봐” 했는데, 하진이가 그걸 살리자고 해준 거죠. “색감 너무 좋은데? 여기서 더 가도 될 것 같아.” 그래서 그 특유의 초록색 톤이 완성된 거예요. 감도가 정말 좋은 친구라 같이 작업할 때마다 도움도 많이 받고, 즐겁죠. 과정이 즐거워서 결과물도 더 그렇게 나오는 것 같아요.

지소쿠리 클럽이랑은 원래 인연이 어떻게 닿으신 거에요?

뮤직비디오 작업을 막 시작하던 즈음에, 저한테 포트폴리오가 딱 두 개 있었어요. 신해경의 ‘감정둔마’‘랑데부’. 유튜브랑 인스타에 올라가면 누군가는 연락을 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연락이 안오는 거예요. 그래서 아, 직접 영업을 해야되는구나 싶어서 포크라노스(POCLANOS)를 뒤지기 시작했어요. 음악이 진짜 좋아서 꼭 협업해보고 싶은 팀들을 찾아서 무작정 DM을 보냈죠. 지소쿠리가 그중 하나였어요. 지소쿠리가 처음엔 1인 밴드였거든요. 바로 협업을 한 건 아니고 이후에 5인조 ‘지소쿠리 클럽’으로 바뀌고 나서부터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찍은 첫 작품이 Take on 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같이 하고 있네요.


그렇게 합이 잘맞는 아티스트가 있는가 하면 모든 작업이 그렇지만은 않잖아요. 또 다시 짖궂은 질문이지만, 예를 들어 제안이 왔는데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음악이 너무 별로일 때. 그럴 때도 작업을 하시나요?
음악이 별로여도 작업은 합니다.(웃음) 그냥 직업 윤리적인 마인드로 가는 거죠. 저는 영상을 찍고 그걸로 돈을 버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좋다 안좋다의 평가는 어느 정도 취향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제가 듣기엔 별로여도, 누군가에겐 명곡일 수 있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듣기에 음악이 너무 별로면 작업할 때 힘이 안 나지 않아요?
솔직하게 말하면 안 나긴 하죠(웃음). 특히 콘티 그릴 때. 노래를 계속 들으면서 영감을 얻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그건 제 문제인 거고, 이건 일이잖아요. 어쨌든 저한테 의뢰를 주셨다는 건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저한테 기대되는 무언가가 있으시다는 거고, 저는 그걸 채워드릴 의무가 있는 거죠. 대신 이런 경우는 제 색깔을 너무 고집하지 않고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많이 반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최대한 맞춰드리는 거에요. 제 취향에 맞는 아티스트를 만나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그런 호불호를 기준으로 일을 가려 받진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어요. 인디씬 전반을 보니까 음악이 너무 좋은 뮤지션들이 많은데, 뮤직비디오 퀄리티가 다 아쉬운 거예요. 저는 진심으로 이 씬의 파이가 더 커졌으면 좋겠고, 잘됐으면 좋겠거든요. 그러려면 대중음악처럼 인디씬의 뮤직비디오 콘텐츠들도 조금 더 개선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요. 거기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제가 이 일을 시작하고, 또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해요. 저만의 작은 사명감이랄까요. 음악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요.

사실 요즘은 인디씬과 대중음악씬의 경계가 흐려지는 추세잖아요. 감독님이 생각하는 ‘인디씬’의 기준이 궁금하네요.
개인적으로는 고집부릴 줄 아는 도전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인디는 어떤 장르나 레벨이 아니라, 존재하고 싶은 방식의 선택에 가까우니까요. 조금 낯설더라도 독창적인 걸 실험해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곳이랄까요? 이 씬 특유의 과감하고, 때론 무모한 용기가 저는 무척 멋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최근에 드는 생각은 예전처럼 그런 용기있는 플레이어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좀 아쉬워요. 그런 '머뭇거림'이 보이면 같이 하는 작업자로서 저도 소극적이게 되거든요. 이 씬을 애정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정말 '멋있다'고 느껴지는 아티스트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묻고 싶어요. 만약에 예산과 필요한 리소스가 충분하고, 내가 원하는 아티스트랑 작업할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으세요?
행복한 고민이네요. 그렇다면 뮤직비디오 대신, 영화과 출신으로서 한국 영화계를 뒤흔들만한 영화를 한 번(웃음). 뭐랄까, 꼭 하고 싶은 내면의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만약 시나리오를 쓴다면 ‘취향’에 대한 이야길 써보고 싶어요. 한국 사회가 트렌드에 정말 민감한 곳이잖아요. 다들 뭐가 유행인지는 잘 아는데, 정작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거기서 오는 공허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신은 진짜 뭘 좋아하냐, 마음 깊숙이 어딘가를 건드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네요.



유연하게 고집부리기: 치우치지 않는 작업자가 되는 법



감독님 스스로 정의하는, 작업자로서 나의 정체성은 어떤 건가요?

그러고보니 요즘 ‘정체성’이라는 말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던 것 같은데요. 제가 하는 작업물들도 어떻게 보면 큰 줄기가 있긴 하지만 되게 여러 가지거든요. 일본 영화스러울 때도 있고, 미국 시트콤 같을 때도 있고, 아니면 완전 한국식으로 할 때도 있고. 그러다보니 저도 할 때마다 약간은 ‘뭐가 나다운 거지’하는 혼란이 있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최근 깊이 고민해보면서 내린 중간 결론은, 애초에 정체성이라는 건 타인으로부터 온다는 거에요.


’타인’이요? 흥미롭네요.
네. 사실 제가 하는 말이나 행동, 작업도 다 결국은 타인으로부터 영향받거나 그들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뤄지는 거잖아요. 물론 어떤 분들은 내가 어떤 옷을 입건, 어떤 작업을 하건 이건 다 내 만족을 위해서야, 라고 하시기도 하지만 글쎄요. 어떤 의도에서 하는 얘긴지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정말 타인이 한 명도 없고 본인 혼자만 이 세상에 있어도 그런 행동을 할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가령 뮤직비디오 작업만 하더라도, 이건 어쨌든 다수의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협업이거든요. ‘컨셉’이라는 것도 협의를 통해서 정해져요. 그게 기본이죠. 작업을 제안해준 아티스트가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면 그 쪽 요소를 섞어주고, 미국적인 스타일을 좋아하면 그 쪽을 섞어주면 돼요. 빈티지스러운 걸 좋아하거나, 반대로 완전히 커머셜한 느낌을 원한다면 그 방향 안에서 설계를 하게 되죠. 그게 저는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의 저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키워드는 타인인 것 같아요. 제가 어떤 타인을 만나냐에 따라서 저의 작업도 달라지니까요.


주관이 뚜렷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인 걸요. 타인이라는 말 대신 유연함이라는 단어로도 정의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표현도 좋네요(웃음).


감독님은 SNS를 철저히 비즈니스용으로만 쓰시잖아요. 일상 얘기는 아예 없고요. 다 작업 얘기만 있죠. 창작을 하다보면 내 얘길 하고 싶을 때도 생길 것 같은데. 지금의 방식을 고수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일단 가장 큰 이유는 제 작품이 그냥 작품으로서만 소비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있어서에요. 어느 정도냐하면, 가끔 다른 스태프 계정에 촬영 비하인드 영상 같은 게 올라올 때가 있잖아요. 그걸 안올렸으면 좋겠어요(웃음). 왜냐하면 촬영장이 보이는 순간 뭔가 이 영상(작품)에 대한 환상이 깨지잖아요. 어쨌거나 촬영장은 스튜디오고, 아까 제가 환상에 대해 말씀드린 것처럼, 영상 안에서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완성돼 있어야 하는 건데. 그게 핸드폰 카메라로 중계돼 버리면 갑자기 현실적인 공간으로 변해버리니까. 특히나 무드가 중요한 작업물에 있어서는 비하인드 필름같은 걸 안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쉽게 비유를 하자면, 인스타에서 엄청 유명한 곳을 보고 방문했는데 실제로 가서 보니까 완전 깨는 상황이 돼 버리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그런 게 싫은 것 같아요.


작업으로서의 아우라를 최대한 지키고 싶은 마음인거죠.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요.
네, 그 아우라가 작든 크든, 심지어는 없든간에. 작품은 오롯이 작품으로서만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실 애초에 싸이월드 시절부터 이런 거(온라인 활동)에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흔적을 남기는 게 부담스럽더라고요. 저는 당장 한 달 전에 올린 게시글만 봐도 후회할 때가 있거든요. 현실적인 타협을 꽤 많이 한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저는 작업을 할 때 ‘이걸 10년 뒤에 봐도 촌스럽지 않아야 한다’라는 신념이 있어요. 그 기준을 스스로 만족시키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런데 사람의 생각은 너무 쉽게, 정말 시시각각 바뀌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온라인 세상은 한 번 올리면 아무리 삭제를 해도 절대 지울 수 없는 곳이어서, 그렇게 불완전한 생각이나 감정들을 표출하고 남기는 게 별로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원하지 않았던 문신이 새겨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사실 많은 작업자들이 SNS를 퍼스널 브랜딩의 도구로 활용하잖아요. 가끔 그게 지나쳐서 주객전도가 되는 경우도 많고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리 수치심같은 걸 느낄 때도 많고요. 실은 그래서 더 SNS를 안하는 것 같아요. ‘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보통 릴스나 스레드 열심히 올리시는 분들 보면 일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잖아요.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차이를 함부로 정의하기도 하고요. 저는 그게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들끼리 어떤 공식같은 것들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건 더더욱요. 결국엔 굉장히 편협해지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이 되거든요. 사고가 갇히게 되니까요.

다만 또 한편으론 어느 정도의 기준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완벽한 정답은 없는 거지만, 각자만의 정답에 가까운 최선이 있을 테니까. 그런 측면에서 아까 말했던 저만의 ‘조급함’이 있는 것 같아요. 계속해서 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은데, 어디로 내디뎌야 할까. 그런 고민이요.

그런 측면에서 감독님께 영감을 주는 존재나 작업이 있나요?
지금의 나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작품들을 만날 때 어떤 실마리를 얻는 것 같아요. 최근엔 영화 <가여운 것들>을 보면서 좀 놀랐는데. 8mm짜리 같은 광각 렌즈를 막 쓰거든요. 일반적인 상업영화에서 대부분 안쓰는 화각이 엄청 나와요. 그야말로 정형화되지 않은 기법을 구사해서 영화 한 편을 만든건데, 그런 데서 영감을 많이 받죠. 아무것도 없는 나같은 사람도 리스크를 생각하면서 작업을 하는데, 남의 자본이 엄청나게 투입된(웃음) 영화를 찍으면서 저런 실험을 할 수 있구나. 그게 먹혔을 때 이런 결과물이 나오는구나. 그런 좋은 고집을 가지는 것이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인 것 같아요.

왠지 더 궁금해지는데요. 감독님한테 있어서 작업자로서 가장 중요한, 지키고 싶은 신념은 뭔가요?
따라 하지 말자. 하늘 아래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고들 하잖아요.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레퍼런스를 참고한 거랑, 표절은 엄연히 다른 거거든요. 눈에 보여요. 많이 알면 알수록 더 쉽게 보이죠. 레퍼런스를 취하되 표절을 피하려면 레퍼런스를 뛰어넘는 퀄리티의 작업물을 내던가,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야 하는데 생각보다 그냥 갖다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제일 흔한 클리셰가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같은 것들이죠. 교복 입은 여학생과 지하철 달리기, 갈대밭 등등. 물론 똑같이 베껴놓고 ‘오마주다’ 주장하면 할 말은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표절이 표절이 아닌게 되진 않죠. 그래서 제 작업을 할 때만큼은 그러지 말자고 늘 다짐하는 것 같아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스스로 얼굴없는 작업자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느끼시나요?
지향하는 방향성은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스스로 저를 ‘얼굴 없는 작업자’라고 부르자니, 뭔가 아이디 같기도 하고(웃음). 제가 약간 칭호를 붙이고 이런 걸 되게 부끄러워하는 성격이라서요. 그래도 그렇게 불러주시면 좋죠. 틀린 말은 아니니까.


앞으로도 계속 얼굴 없는 작업자로 남고 싶으신 거죠?(웃음)
네. 유명해지면 물론 좋겠지만요(웃음). 그냥 제가 좋은 작품을 계속 하면 사람들이 알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그런 얘기 자주 하거든요. 결국 묵묵히, 열심히 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언제나 과정 속에 있는 것 같아요. 계속 좋은 작업을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얼굴없는 작업자들 4편 끝.
우용 / Wuuyong

언젠가 나만의 영화를 찍고 싶은 뮤직비디오 감독. 다양한 아티스트의 음악 속 세계관을 시각물로 구현하는 작업을 한다. 혼자 차 안에서 듣는 음악을 가장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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