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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법을 다시 공부하는 것.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다시 써보는 것. 내가 선택한 에디터로서 최후의 자기계발 과목은 이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를 사랑해 보려 하니, 이게 너무 막막한 거지. 같은 인간을 사랑하는 일도 매일 새롭게 벅찬데 갑자기 또 다른 존재들을 ‘사랑’씩이나 하려니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단위를 <관찰>로 낮추고, 나 자신과 가장 가깝게 존재하는 사물들부터 하나씩 <관찰>해보기로 했다. 바라건대 이 관찰일지가 만약 그다음의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내 사랑의 여정은 다음과 같은 모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관찰 > 발견과 재정의 > 각인 > 사랑 > 취향

그러니까 이것은 새삼스러운 발견의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사두고 오랫동안 까보지 않았던 빈 수첩에 수집한 단어들을 채워 넣는 과정이자, 사회성이 다소 떨어지는 에디터가 세상과 다시 관계맺는 회고록이다. 일밖에 모르고 살던 30대 초반 여성이 나 자신과 화해하는 일기장이고, 먹고 사는 일의 지난함에 대해 푸념하는 대나무숲이다. 에세이를 빙자해 이불킥 하고픈 흑역사의 누적이 기대되는 가운데, 나는 과연 감도 있는 나만의 일상 속 취향 리스트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모르지, 생각보다 꽤 그럴싸한 정물화 한 점을 그릴 수 있게 될지도.

아니, 아니다. 이제부터 ‘그럴싸한’ 같은 표현은 금지다. 다시 쓰겠다.

“또 모르지, 제법 나다운 정물화 한 점을 그릴 수 있게 될지도.”

​사물의 재구성

프롤로그: 취향이 없어도 에디터를 계속할 수 있을까

<관찰력 기르는 법>의 저자 사도시마 요헤이는 ‘일어나버린 모든 일은 옳다’,고 썼다. 인생을 구성하는 모든 사건은 사후적 해석에 의해 좋은 일, 또는 나쁜 일이 된다. 어떤 일의 의미를 결정짓는 건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 즉 관찰력에 달려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 내 인생에 일어나버린 일, 그중 가장 당혹스러운 것을 뭐라고 정의해야 좋을까. 나의 판단이 옳을지 오래 고민했으나 역시 ‘에디터가 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쩌다 에디터가 되었을까. 애초에, 나 같은 사람을 에디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주변 사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더는 미루지 못하고 지금 그것을 시작하게 된 건 이 해묵은 ‘자기 불화’ 때문이다. 도대체 그때 나는 왜 에디터라는 직업을 갖고 싶었을까.

 문희경

지금 같은 대 브랜드의 시대가 찾아오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서로의 취향에 관해 묻곤 했다. 나는 언제나 그것이 버거웠고, 어쩐지 그 질문에 지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가장 좋은 것, 가장 희귀한 것을 찾아내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나의 음악적 선호, 좋은 음식의 기준, 욕망하는 옷의 디자인, 좋아하는 호텔 객실 타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 ‘좋아함’의 목록은 절반쯤 진실이고, 절반쯤 거짓이다. 주변과의 비교를 통해 언제든 갱신될 수 있는, 한시적 관심의 모음집. 스스로 유행에서 벗어나 있다고 으스댔으나 실상은 언제나 그 안에서 가장 안전한 지대를 찾아 헤맸을 뿐인.

 

무언가를 좋아하는 흉내를 계속 낼 수 있었던 건 불행하게도 내가 주변의 다른 친구, 동료들보다 ‘좋은 것’을 먼저 알아보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덕분이었다. 새롭게 소비할 물건과 서비스, 공간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왔고, 나는 크게 애쓰지 않아도 그것 중 무엇이 가장 비싸고 이슈될만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에 그럭저럭 해온 글쓰기는 그것이 정말로 비싸고, 중요한 이슈인 것처럼 포장할 수 있게 해줬다. 나 자신도 속을 만큼. 좋아하는 게 딱히 없어서 오히려 무엇이든 좋아하는 척할 수 있는 이 재주는 상업적 글쓰기 영역에서 꽤 요긴하게 쓰였다. 나는 그렇게 에디터가 됐다. 여태 많은 매력적인 거짓말들을 겨우겨우 써내며 커리어를 쌓았다.

영혼 없는 에디터의 탄생

그놈의 ’취향’, 그것 때문에 밥줄 끊기게 생겼어

하지만 모든 것이 흔들린다. 더 이상 괜찮은 척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어째서 이렇게 돼 버렸지, 이제 와서. 매거진 <B>의 직업인 탐구 저서 <JOBS>는 에디터를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골라내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 문장에 공감하는 업계 사람들이 꽤 많은 것을 보며, 나는 뾰족하게 설명하기 힘든 공허함을 느꼈다. 취향을 묻는 사람들을 피해 그토록 열심히 도망 왔건만, 이젠 시대가 나에게 취향을 묻다니. 취향이 밥그릇의 자격이 되다니. 무릇 좋은 에디터는 필요에 따라 사물과 현상으로부터 자아를 잘 지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 적당히 두루두루, 많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회색분자인 나야말로 에디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바야흐로 취향이 포트폴리오를 이기는 세상이다. 좋은 것을 골라내려면, 일단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좋은 감도를 지닌 에디터는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다. 그럼, 나는?

설상가상 어떤 이유에선지 나는 더 이상 마음 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글을 쓸 수 없게 돼 버렸다. ‘취향도 모호한데, 애정이 없는 게 작업에서 티가 나는 유형’이라... 트렌드 변화에 휩쓸리는 업종의 직업인으로서 이것은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이런 나를 에디터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걸까. 아니, 나 앞으로도 에디터로 일할 수 있는 걸까? 매몰비용과 기회비용 사이에서 생각한다. 그만둘 것이냐, 계속할 것이냐. 정답을 쉽게 내릴 수 없는 건 아직 다 해보지 않은 노력이 남아있어서일까. 그렇다면 그건 뭐지. 개발자가 되기 위해 코딩을 공부하고, 요리사가 되기 위해 한식과 일식, 양식 자격증을 딴다면, 만사에 심드렁한 에디터가 좋아하는 것이 많은(혹은 뚜렷한) 에디터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랑은 너무 멀어, 우선 관찰부터 시작하자

<better day - haruka nakam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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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경

자기 얘기 한정 실어증에 시달리는 텍스트 노동자. 대체로 에디터로 불리며 일해왔지만 안맞는 옷임을 깨닫고 뒤늦게 자아 탐색중.

〈사물의 재구성〉

자기 얘기 못하는 에디터의 일상 관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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